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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5-06-15 1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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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감병용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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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 20년 만에 고향을 방문해 문학 강연을 했다. 말문을 열면서 청중에게 두 가지 질문을 제시했다. 첫째 ‘시인은 우주의 한 모퉁이씩이나 되는가?’, 둘째 ‘시인은 얼마나 많이 알고 있어야 할까?’ 첫 번째 질문은 논두렁길을 함께 걷다가 발을 헛디딘 함민복 시인에게 어느 소설가가 했다던 말에서 비롯한다. “아이쿠, 시인이 다치는 것은 우주의 한 모퉁이가 깨어지는 것과 같은데….” 이 일화는 아주 오래전에 읽은 함 시인의 산문집에 나온다(기억에 의지한 것이라 대사가 꼭 같지는 않지만 뜻은 정확하다). 두 번째 질문은 15년째 〈시사IN〉에 격주로 신간을 소개해온 나 자신으로부터 생겨났다. 많은 책을 읽으면 시나 소설채권금리
을 쓸 때 도움이 될까.
다산 정약용(1762~1836)과 윌리엄 블레이크(1757~1827)는 각기 조선과 영국에 떨어져 살았다. 두 사람은 만난 일이 있기는커녕 서로의 존재를 알지도, 서로의 글을 읽지도 못했다. 대신 그들의 생몰연대에서 알 수 있듯이 다산과 블레이크는 동시대를 살았다. 두 사고등학생주식
람은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당대의 조선과 영국은 거대한 시대적 변환을 맞이했다는 점에서 같은 공간에 있었다고도 할 수 있다.
정약용은 실학(實學)의 집대성자다. 실학을 정의하고 설명하는 방법으로 다산이 펼친 경세론(국가 운영 논리)을 제시할 수도 있지만, 실학은 성리학의 반대 노선으로 손쉽게 파와이지엔터테인먼트 주식
악된다. 한 마디로 성리학은 ‘더 나은 인간’이 되는 것이다. 가난한 아이 앞에서 좋은 옷과 맛난 음식을 자랑하는 부잣집 아이가 많지만 그것을 자랑하지 않는 아이가 있다면, 그 아이는 앞의 아이보다 분명 ‘더 나은 인간’일 것이다. 또 자기 집이 부자라는 것을 자랑하지 않을 뿐 아니라 가난한 아이에게 자신의 것을 나누어 주는 아이가 있다면, 그 아이는 앞의텍셀네트컴 주식
아이보다 훨씬 ‘더 나은 인간’일 것이다. 더 나아지기 위한 수련(교육)을 차곡차곡 밟은 끝에 인간은 성인(聖人)이 된다. 이것이 성리학의 요체라면, ‘조선 왕조는 성리학 때문에 망했다’라고 저주하는 게 이상하다.
성리학에서는 인의예지(仁義禮智)가 인간에게 주어진?본연지성(本然之性)이라고 말하지두산엔진주식시세
만, 실제?누구는 더 많이 갖고 태어나고 누구는 적게 갖고 태어나는 것이 본연지성이다. 개는 훈련을 받으면 ‘더 나은 개’가 되지 ‘더 나은 인간’이 될 수 없다. 마찬가지로 상민(常民)은 더 나은 상민이 되고, 서얼(庶孼)은 더 나은 서얼이 되고, 여자는 더 나은 여자가 되고, 오랑캐는 더 나은 오랑캐가 될 수 있지, ‘더 나은 인간’은 못 된다. 조선은 성리학의 나라였으니, 성리학 때문에 조선이 망했다는 말도 괜히 나오지 않았다.
다산은 인간의 내면에 인의예지가 본성으로 주어져 있다는 성리학의 교설을 정면으로 반박했다. 인의예지는 행동과 일에서 실천된 후에야 비로소 생겨나는 것이지 마음속에 있기만 한 것을 인의예지라고 불러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다산이 직접 쓴 ‘자찬묘지명’의 한 구절이다. “본연지성은 원래 불서(佛書)에서 나온 것으로 유교의 ‘천명지성(天命之性)’과는 물과 불처럼 함께 말할 수 없는 것이다.” 본연지성은 주희(朱熹)가 불교에 대응하고자 불교의 교리를 응용하여 만든 것이지 공자의 가르침이 아니다. 이런 반론은 성리학이 철저하게 구획했던 신분 질서를 무너뜨리고 모든 인간이 ‘더 나은 인간’이 될 수 있게 해준다.
500권이나 되는 방대한 저술을 남긴 정치가요 학자인 정약용은 2500여 수나 되는 시를 쓴 뛰어난 시인이기도 하다. 다산의 시를 골라 모은 〈다산시선〉(창작과비평사, 1981)과 〈다산의 풍경〉(돌베개, 2008)은 이론이 아닌 실학의 파토스(감성)를 고스란히 보여준다. 조선시대에 사대부 모두가 시를 썼다지만, 다산과 같은 시관(詩觀)을 가진 사람은 없었다. 그는 유배지에서 아들에게 보낸 편지에 이렇게 썼다. “세상을 걱정하고 백성들을 긍휼히 여기어 안타까워서 그냥 두지 못하는 그런 간절한 뜻을 항상 가져야 시가 되는 것이다. 자기 자신의 이해(利害)에만 연연하면 그 시는 시라고 할 수가 없을 것이다.”
신입생 시절 접한 여섯 행
다산이 누적된 사회적 모순이 터져 나오는 조선 후기의 변동기를 살았다면, 블레이크는 산업혁명과 프랑스혁명이라는 경제·정치적 변혁기를 살았다. 그의 대표 시 가운데 한 편은 132행에 걸쳐 2행 대구(對句)가 이어지는 ‘순수의 전조’다. 생태사상가이자 문학평론가였던 고 김종철 선생은 마지막 문학평론집 〈대지의 상상력〉(녹색평론사, 2019)에서 영문학 신입생이던 때 우연히 이 시의 다음 여섯 행을 접했던 것이 훗날 〈녹색평론〉을 발행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말한다. “새장에 갇힌 울새 때문에/ 천국이 분노에 휩싸인다./ 비둘기로 가득 찬 비둘기 집 때문에/ 지옥 전체가 부들부들 떤다. / 주인집 문 앞 굶주린 개는/ 국가의 멸망을 예언한다.”
블레이크의 시에는 인간에게 생명과 자유를 빼앗긴 동물, 부모와 사회의 돌봄을 받지 못하고 거리로 내쫓긴 아이들, 가부장제와 남성의 욕망에 희생당하는 여성이 반복해서 나타난다. 그가 지금도 시를 쓴다면 이주노동자·성소수자·장애인·고령 노인에 대해 쓸 것이다. 〈한 송이 들꽃에서 천국을 보라〉(한울엠플러스, 2024)나 〈윌리엄 블레이크, 마음을 말하면 세상이 나에게 온다〉(아이콤마, 2023)와 같은 시선집을 읽으면 그런 확신이 든다. 산업사회의 가장 어두운 곳에서 신음하는 약자의 해방을 노래한 블레이크의 시는, 신분 질서의 가장 낮은 곳에서 멸시당하는 사람들을 안타깝게 여긴 다산의 시관과 통한다. 그리하여 우주의 한 모퉁이씩이나 될 리는 없는 시인이 현실의 한 모퉁이가 되는 것이다.
시인은 얼마나 많이 알고 있어야 할까. 프란츠 카프카는 생명과학도, 인공지능도, 〈조선왕조실록〉도, 세계사도, 미셸 푸코도 뭣도 몰랐다. 그보다 이전 사람인 윌리엄 셰익스피어는 카프카보다 더 모르고, 소포클레스는 셰익스피어보다 더 모른다. 유일신론도, 신대륙도, 제1·2차 세계대전도, 포스트모더니즘도 모르는 소포클레스는 바보다. 그런데 누가 이 바보들을 뛰어넘는 작품을 쓰고 있나. 바보는 카프카·셰익스피어·소포클레스가 모르는 것을 똑같이 모르지만, 인간에게 가장 기본적인 것을 안다. 배고프면 밥을 먹어야 하는 것, 추울 때는 집이 필요한 것, 맞으면 아프다는 것, 사람은 사랑받아야 하는 것을 안다. 시인은 바보인 것으로 충분하다. 그런데 시인 가운데는 바보보다 더 많이 알고 있으면서, 바보가 아는 것을 모르는 사람도 있다. 대통령 후보들도 다르지 않다.
장정일 (소설가)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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